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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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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교육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갖추었다. 상비군은 약 20만이며 그중 실질적인 전투병력은 1895년 기준으로 15만이다.[* 같은 시기 북양군의 '''총 병력'''이 10만 명이었다.] 군 근대화 사업 초기에는 실질적인 전력이 7만명이었고 나머지는 제방 등 중요 인프라 건설에 투입됐다.[* 이것만 해도 체계적으로 병력자원을 관리하고 동원하며 집단행동을 몸에 새겨넣을 수 있다는 의미인지라 엄청난 발전.] 장교는 군관, 부사관은 사관, 병은 군졸이라 부르며 장교의 계급은 정부참, 부사관의 계급은 상중하 체계이다. 장교는 더 이상 무과로 취재하지 않고 사관학교 '엄익관'과 [[학사장교]]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선발하며, 부사관은 징병된 양반가의 자제들이 맡는다. --신미년에 성상께서 이필제를 화로에 처넣은 이래로--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복무 기간은 3년이다. 기실 이필제 건이 아니더라도 징병제 역사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국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남자 두엇 모이고 술 들어가면 군대 얘기가 나오는' 수준까지 군사화됐고, 그 결과 1895년 동원령을 선포했을 땐 '''60만명'''을 소집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막대한 전비 부담을 각오하고 투입한 병력이 약 30~5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지역강국.[* 이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약 2000만이다. 반면 원래는 작중 시점으로부터 10년 뒤 벌어지는 러일전쟁당시 일본은 최소 4000만 이상의 인구를 보유했다. 이는 절반도 안되는 인구로 더 늦게 개화했음에도 더 많은 군대를 징병하여 원정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을축양요]] 당시에는 왕묘를 지키기 위해 원 역사 이상으로 치열하게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벨로네 백작과 로즈 제독의 책임 회피용 언론 플레이 덕분에 막 개항했을 때부터 대외적으로 '의외로 강한' 준문명국의 군대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철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군의 점령 가능성을 고려했을 정도.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80년 기준, 병조에서는 조선군의 전력을 [[쓰시마섬|대마도]]를 무력으로 병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라 일본 측에서도 이를 진지하게 의식할 정도로 객관적인 자기평가에 가까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895년에 근대 화기로 무장한 병력 60만을 순식간에 동원하면서 열강들 사이에서 그저 '평화를 사랑하는 극동의 괴짜들'로 여겨졌던 조선의 대외적인 인식이 '''[[간디(문명 시리즈)|평화를 사랑하는 극동의 프로이센]]'''으로 격상됐다. 이렇게 기괴할 정도로 군사력이 증강된 이유는 귀남의 기억 속에 한국전쟁이 강하게 남아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과 같은 내부 반란이나 [[나선정벌|효종 시기 청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러시아와 싸운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전쟁 한 번도 없었음에도 군축은 커녕 지속적인 무기 국산화와 개발, 군비 정예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귀남의 지시로 조선군이 막 미니에 라이플을 도입했을 때부터 또다시 귀남이 언질을 주며 자체기술로 자동소총 설계에 들어가 윤음 내려온 지 20년 만에 반자동소총 설계도가 나왔다. 오죽하면 신료들 사이에서도 '''성상께서 오직 화포에 있어서는 주마가편[* 走馬加鞭. 달리는 말에 채찍질]으로 일관하신다.''' 라고 말 할 정도. 그런데 희한하게도 조선 내부에서는 이런 군비 정예화에 어느 정도 우려는 있을지언정 큰 반발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병자년 이후에 큰 전쟁이 없긴 해도 반대로 그 이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 땅의 전쟁사는 언제나 국가의 명운을 건 총력전의 연속이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 군복을 사용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꽤 멋있다고 평가받는 검은색 제복이지만 이는 이후 귀남의 지시로 '어제국방색'이라고 불리는 쑥색 군복으로 바뀌었다. 멋은 없어도 흙먼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고 또 [[위장|숲이나 들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묘한 색]]이라 일선 군졸들이 좋게 여긴다. 당초 사용하던 대한제국군 군복은 예복으로 대체됐다. 아직 단발령이 내려지지 않아 군모 대신 전립을 쓰고 다닌다. 군가로 [[희망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월남 김상사 타령]] 등이 있다. 귀남이 기억하고 있던 선율에 친제한 가사를 적당히 붙인 것이다. 병부 산하 싱크탱크로 정강사가 있다. 원래 흥선대원군이 [[북벌]]을 목표로 장성들을 몰래 꾸린 사조직이었지만, 비행기 개발을 시작으로 군 내 공식 조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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